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마가복음11장1-10)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때 수많은 군중들이 겉옷을 길가에 펴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찬양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주님이신지 모르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며 찬양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이 아닙니다. 현대교회에서도 웅장한 싸운드와 함께 빈틈없이 진행하는 찬양팀과 함께 뛰며 찬양하지만, 이 찬송이 주님의 마음에 닿는 찬송이 아니라, 나의 만족감만을 채워주는 찬송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이 훌륭하고 웅장하고 감동적일수록 주께 올려지는 찬송인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중국 지하교회에는 50절까지 있는 찬송가가 있어 한 곡만 불러도 50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악기가 없이 두 시간을 부르는데도 전심으로 행복하게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 마음에 닿는 찬송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훌륭하게 잘 갖추어진 악기가 있든지 없든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이 찬송이 하나님 귀에 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할 때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저 찬양했다고 옥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감옥문이 열리는 찬송을 했기 때문에 열린 것입니다. 찬양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에 닿는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의 찬송은 예수님의 마음에 닿는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목적 성취만을 위한 찬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의 왕이 될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때 내가 뭔가를 쟁취할 수 있다는 각자의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찬양했습니다. 이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니 호산나하며 찬양했던 군중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외쳤고, 무능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분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찬양하는 이유는 내 만족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야망이나 목적을 따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할 때, 찬송의 능력이 옥문의 능력보다 컸던 이유는 감옥인들 어떠하랴, 감옥 밖인들 어떠하랴, 초막인들 어떠하랴, 궁궐인들 어떠하랴 하며 오직 주님을 향한 찬송이었기 때문입니다.
찬송에는 목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만으로 찬양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최고의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는 동안 만가지 응답이 없어도 영원히 죽을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여전히 찬양할 수 있습니다. 깊은 웅덩이에 빠져있습니까? 무거운 짐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까? 그때는 원망할 시간이 아닙니다. 그때는 찬송할 시간입니다. 무엇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호산나 찬송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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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1> 내가 받은 은혜와 깨달음을 나눠 보세요.
나눔2>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을 것 같은 나의 찬양은 언제였는지 나눠 보세요
나눔3> 하나님께서 어떤 찬양을 기뻐 받으시는지 나누어 보세요.
나눔4> 목적을 가진 찬양은 왜 위험하며, 어떤 찬양이 힘이 있는지 나눠 보세요.